그리스도의 길

 

종교란 인간과 신과의 역결합-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길 .

인생에서의 심원한 문제점들에 대한 자각 .

기도을 통해 건강을 치유할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심도있는 변모를 위해서도 우선 예수가 던진 질문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6). 혹은 "네가 지닌 불온전함중에서, 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에서 전진하려면, 꼭 고쳐야만 하는 점이 무엇인지 아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게 중요하다. 여기서 "실마리, 즉 단서"가 되는 것은 보기에는 아주 보잘것 없는, 우리가 보통 종교적으로 굳이 간주하지도 않는 일상사에서 찾아질수 있다. 어린아이가 청소년으로 또 성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능력들을 획득하기 마련이다. 그리고본래 지녔던 원초의 경험체험능력은 그로 인해 뒤덮여버리고 말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이 기억력과 기도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이렇게 뒤덮여 잊혀지고만, 본래 그대로의 자연적인 체험양상들을 다시 새롭게 획득할수도 있다. 그런다 해도 성인적인 능력은 같이 보존할수 있으며, 경직된 성격 성질도 다시 부드러워지고, 여유있게 된다. 인간 삶의 영적, 정신적 또는 외부적인 파괴 손상에서 오는 인간의 분열현상, 즉 지성과, 독자적이 되버린 욕구본능, 그리고 그 중간에 끼여버린 우리의 "가슴, 즉 우리의 마음과 정서"를 다시 일치시키고 강화시키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낙원신화에 나오는 "자각의 나무에 달린 열매, 즉 선악과"는 이러한 인간분열과 관련된 것이다. 또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는 예수의 말도 돌이킴이 가능함을 깊이 깨닫고 자각하는데서 기인한다. 마테복음 18,1-3; 마가복음 10,15; 누가복음 18, 17. 여기서는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모든 인간발전의 토대가 되는 원형적, 본래 성향을 말한다. 이것은 마치 각종 상품물건들에 "사용법"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예정점지되어 있지만, 언젠가 상실해버리고 만 "인간 사용법"의 일부와 같은 것이다. (1 2) 이런 길을 따를 때만이, 오늘날 이성의식의 명백한 한계점을 넘어설수 있다.

(1 2) 그러므로 부정적 (사탄적) 성격을 극복하는 것은 이미 언급된 분열을 치유하는데에도 관계된다. 원형적 이라는 것은 씨.쥐.융 등의 심층심리에서 나온 개념이다.  
원형:융 (C.G. Jung) 의 심층철학 (Tiefenpsychologie) 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로 체험할 수 있는 인간존재의 기본형.  그러나 그런 다른 길들도 기독교에서의 길과 동일한 목표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원형 많은 경우 착잡과 오해의 콘텐츠가 있습니다. 하나님 노인으로 묘사되고, 천당 지옥 집단 무의식 원형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융은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수준의 의식에서 핵심은 적어도 사람들에게 인상을 주는 이미지 아이디어로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초기에, 심지어는 신화적인 의식 같은 시기 이전(……) 일종의 원시 기억으로 나타납니다. 수준의 의식에는 또한 정도의 차는 있어도 사람들이 경력한 (……) 같은 이러한 표면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적절한 관점을 통해 수준에서 하나님 개념은 모호하며 과장된 묘사라는 (……) 드러냅니다. 신화 전설은 창의적 방식을 통해 상징주의 세계와 상호 작용하려고 시도했는데, 실제로 아이들에게 유용할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인간의 많은 측면에 영향이 있는 상징을 넘어서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전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그릇된 개념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직접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결국 혼자힘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해낼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세 이를 수행하도록 실제으로 방법을 제시하고, 힘과 은혜를 준다. 기독교적 진실을 추구하는 자, 기독교 신비주의자, 기독교 연금술사등이 그러한 온전함을 성취하는 길을 밟은 것이 명백하다. (예로 마테복음 5,48; 요한복음 10,34;등 비교). 기독교인들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다수 이방면에 경험을 쌓았다. 그들이 묵묵히 내적인 신아의 길을 추구했나, 아니면 신앙심을 사회활동을 통해실현시켰는가, 혹은 우리가 "전적으로 기독교적"이라고 부르듯 양자를 자기안에서 합치시켰나는 그와는 관계와 없는 별개의 문제다. 수천년간 여러 문화권에서는 인간 내부의 분열과 상심을 극복하는 법, 다시 말하자면 즉 도를 추구해왔다. 도교의 연금술사들과 다양한 종류의 요가등에서 한 노력이 이를 증명한다. (2 3)

(2 3) 마찬가지로 인도어로 요가라는 말은 멍에를 지운다는 말로서 만물의 근원 또는 영원한 것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신인간, 즉 신이며 동시에 인간", 또는 신이 보내신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는 이 "새(로운" 아담)은 인간에 이미 상실해버린 본래 고유의 성격을 다시 획득할수 있다는 신호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위험할 정도로 늘어난 곡해된 인간삶을 이제 정리 정돈할 때가 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예수는 지상세계를 위한 "행운의 선물"로써 의미있는 삶의 근본출처이신 신의 존재와, 극도로 발전한 인간의식과 정서를 한몸에 통일시켰다. 예수는 타락의 세력도 극복했다. 비록 그가 타 인간과 차이점을 보였다 할지라도, 결국 그도 역시 인간이었고, 그의 삶을 인간으로서 실현시켰던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이 길을 더 쉽게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실행하면 더욱더 그렇다. 역사적 사실로써의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예수의 삶과 부활이 전혀 영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섬에 사는 짐승이 새로운 뭔가를 배우는 때와도 같다. 외떨어진 섬에 사는 짐승들의 경우이런 능력들을 갑자기 훨씬 더 빨리 발달시킬수도 있다. 왜냐하면 독일인 알. 쉴드라케가 깨달았듯이, 짐승이란 모두 보편적인 힘의 장 (mutual field of force) 을 지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선은 교회의 중재 없이도 예수와, 그리고 신과 내적관계를 맺을 수 있다. 물론 각자에게 맞는 기독교인 형제자매들의 공동체가 있는것이 도움이 되기는 한다. 여러가지 서로 상반되는 내용의 신학논리에서, 예수를 한편으로는 인간영혼을 돌보아주는 후원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개혁하는 자로 이분시킨 처사는 궁극적으로 볼때 그리 지혜로운 일은 못 된다. 몇몇 소수인들의 경우, 특히 여러가지 신학의 논리들을 잘 아는 자들의 경우, 이해의 돌약을 돕는다해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인간 각자가 예를 들어 "조용한 골방"에 들어가, 혹은 시끌벅적한 시장바닥에서조차도 예수를 인생의 촛점으로 삼을수 있다. 이는 (복음)으로 지금까지 구전해오는 예수의 특성을 기억함으로써 그렇게 할수도 있다. 예수를 그의 사후에도 인지지각할 수 있다는 것, 즉 이승에서 눈에 보이는 몸과 형체가 없이도 느낄수 있다는 것등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현재 역시 영향을 끼치시는 분이다. 또 다수의 인간들이 스스로 목격 경험한 바와 같이, 인간도 의식체로써 (자기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수도 있다. 죽었다 깨어난 사람들도 있지 않는가?

 

나의 근원이며, 나를 도우시며,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3]와 일체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나에게, 나를 신으로 멀어지게 한 것들을 용서하소서;[4]
성령을 통해 나를 창조적이 되게 하소서. [5]
나를 당신의 길로 끌어 올리소서.

(3) 성모 마리아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여기에 마리아를 첨가해도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남성적, 여성적 특성이 승화된다.

[4] 계속해서, 부정적이라고 느껴지는 감정과 심정의 동요를, 구체적으로 그때마다 내적으로 관찰한다.

  • 내적으로 관찰한다. (예를 들어 불안감, 증오심, 무관심과 냉담, 거만함, 필요이상의 과장된 회의감, ... 혹은 머리속에서 생각으로만 떠오르는, 아니면 말로 나오는 문제점들, 그 예로 마테복음5,22 비교).
  • 그런 문제점들에 골몰해 빠져들기보다는, 잠시 침착하게 기다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무슨 문제인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최대한 의식적으로 떠올려본다.
  •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는 육체적으로도 감지할수 있듯, 부담이 되버린 (정신적인) 짐을 기도를 함으로써 신께 맡긴다. (또는 인생전로를 모두 신 또는 그리스도에게 맡길 수도 있다.)
  • 그 후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거나, 혹은 스스로의 의식세계에 "답"이 저절로 떠오를 때까지 침착히 기다린다.

[5] 침묵속에 하루 일어난 일들을 '안정' 시켜야지만, 그를 내적으로 소화시키고, 기도 드리기에도 더 쉬어진다. 그렇게 하면 다시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더 마음이 열린 상태가 된다.

 

이러한 과정서의 도덕윤리의 의미 .

이 여정의 한 단계가, 바로 만물위에 존재하시는 "신에 대한 사랑"이며,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테복음19,19)는 이웃사랑, 그리고 또한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것은 각자 처한 환경안에서 스스로가 할일을 깨달으려는 노력의 일부가 될수도 있다. 사랑은 예수와 연결된다. 그 이유는 예수의 가장 중요한 성격이 바로 이 사랑이며, 사랑은 지혜와도 연결되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적인 의미에서의 선행을 실천함이 내부적 또는 외부적으로 효과를 보여서, 비로써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예수는 기존도덕의 근본규율들을 유지시켰다. 그 이유는 인간은 (보통) "심는데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전서 6,7)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외부적 규칙을 강조하기보다는, 각 개인들 스스로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맡겼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내부에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경험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양심이라고 느끼는 것과 상응하며, 그로 인해) (요한복음 3) 에서 말하는 것처럼 "새로 거듭 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전체 인간이 예수가 몸소 먼저 모범을 보이신대로 점점 더, 영혼과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인간내부의 원초의 출발점은 우리 마음이나 영혼, 혹은 정신세계에서 경험할수 있는데,경험의 형태는 개인마다 다르다. 각 개인이 어떤 형태로 그리스도 또 그리스도의 힘을 경험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몇번이고 자주, 개개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의식세계로 불러드리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신과) 더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리 대단한 효과가 없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마찬가지로 부단히 반복해야한다.

이렇게 인간내부에서 신의 은총으로 힘이 발달하면 "외부적인" 그리스도, 또는 신에게서 유래한 보편적 치유력으로의 길도 더이상 멀지 않게 된다. 이는 개인마다 체험하는 양상은 다를수 있다 하더라도, 명백해질 것이며, 주위환경에도 상응하는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지금까지는 극소수의 인간만이그러한 심도있는 경험을 했고, 이들은 후에 이러한 "외부 즉 신에게서 유래한" 보편적 치유력은 인간이 수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자신안에 그와 유사한 것이 발달되 있지 못한 사람일 경우에는 고통스럽게 차단의 벽에 부딛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럴 경우에 "심판"이라고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나를 인도하여, 타인이 당신에게 나가는 길에 피해를 주지 말게 하소서 (6)
나를 인도하여, 당신의 뜻대로 타인을 돕게 하소서
내가 가는 여정에 나를 보호하소서
[7]
나를 도와, 당신의 사랑과 더욱 더 조화를 이루게 하소서

(6) 우리 각자에게서 확인한 불완전하고 미숙한 점들, 그리고 또한 긍정적인 성격등을 마치 도표를 작성하듯이 기록해 보고, 그럼으로써 자기 발전을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될수도 있다 :

  • 저마다의 문제점들을 인생에서 발생하는 일과 사건들에 따라 직접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 예를 들어 스스로 좋은 방행으로 개선하려는 결심을 하는 일등은 예수에게서도 역시 중요하다. "...먼저 네눈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마테복음7,1-5). 이슬람교에서도 자기 자신의 연마 수양은"위대한 지하드 Grosse Gihad", 또는 "성전 즉 위대하고 성스러운 전쟁"으로 통한다. 이는 결국 외부와의 투쟁보다도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활을 하는 것이다.
  • 즉시 화해하라
  • 그리고 가능한 한 직접 서로 용서할 것.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신에게 기도를 드려 그 문제의 해결책을 간구하고 청하며, 내적으로 용서를 베풀라. 이것은 역시 예수에게도 중요하다. 예수도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내적으로 청산정리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2,59; 하지만 아래 5.번를 보시오)
  • 불가피한 경우,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보다는, 타인에게 적당한 선행을 베풀 수도 있다. 신이 간접적으로 다반사를 정화하시기도 한다. 이는 예를 들어서 누가 공동체를 위한 일을 떠맡을 때를 말한다. 기존의 과거지사를 청산하는 것과, 자유의지로써 남을 돕는 역사를 이루는 것은 서로 연결되는 일이다. 그후에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 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37.을 비교하라 ('심는 자와 거두는 자') 그러는데 있어 마테복음7,20-21: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 "내이름으로 주께 기도하라" 삶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용서와 은혜를 빌라. 바로 이것이 인간의 윤리나 도덕이 제공할수 없는, 중대한 (주님만이 주실수 있는) 도움인 것이다. 그리하면 숙명이나 운명이 꼭 기계적으로 진행되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이런 경우 인간은 마치 신이 인도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고, 모든 것을 소화해 낼수 있고, 더욱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마치 신이 최고의 지혜로써 각개인들과 그 주변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길을 계획해 놓은 듯한 느낌도 갖게 된다.

[7] 다른 사람 이름을 여기에 추가해도 된다.

어린 아이가 성숙한 인간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위를 참조), 역시 인간의 문화에서도 옛날부터 비슷한 의식발전의 단계를 거쳤다.

어린 아이가 성숙한 인간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위를 참조), 역시 인간의 문화에서도 옛날부터 비슷한 의식발전의 단계를 거쳤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새로운 능력들 (자유의지, 감성과 사고력)을 획득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창조만물"에 대한 본래의 친숙함을 감소되고, 그로 인해 문제가 많이 창출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쟝 겝세르 (Jean Gebser) 의 "근원과 현재 Ursprung und Gegenwart" 를 비교하시오. 차례대로 원형적, 마술적, 신비적 이성의식. 또 그를 초월해서, 훨씬 더 확고하며, 모든것을 통합시키는 류의 의식, 즉 우리가 이성적 의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을 발전시킬수도 있다.) 거기에는 또한 그러한 발달단계를 맹아부터 알아보게 하고, 적어도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정도의 규모로 발달할 수 있도록 한, 탁월한 본보기를 보여준 선인들의 역활도 컸다. 이는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일어났지만, 이미 언급한바와 마찬가지로 가끔씩은 그로 인한 손실도 컸던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오늘날 우리인류 종족이 살아남으려면, 숙명적인 과업앞에 섰다는 것을 안다. 즉 다시금 "비약적 성장" 네지는 벌써 이천년전부터 예정되있는, 진화의 과정단계를 계속 밟아야 하는 것이다 (8). 이는 인간의 기존획득능력들, 예를 들어 이성등을 더 이상 값으로 치르지 않고도 가능하다. 각 개인들 충분수가 늘 이성의식을 전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스스로를 새롭게, 인간본연의 신성한 근본과 결합시키면 (9), 계시록적인 재앙과의 시간싸움도 "위"로부터의 도움을 받아 이길수 있다. 그에는 외부적 엑티비스트 (행동주의자)들의 행동, 예를 들어 평화주의운동같은 것도 포함된다. 선의를 품은 자에게는 모두"이 재앙과 시간을 다투는 시합 (Game)" 에서 "마땅히 설" 자리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다수가 믿는 종교종파와 관계없이, 이를 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 미래로 먼저 나아가서, 과거를 청산정리하는 것을 돕는다. 아직 "평범함"이 지배하는 때라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에게는 종래가치관의 절대적 변형이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금까지 반복되오는, 낡은 (역사방식을) 반복할 경우, 종말이 어떨지를 뻔히 들여다 볼수 있기 때문이다.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듯, 선행 하나하나가 전체로 흘러든다.

(8) 독일의 철학자 허베트 그륄 (Herbert Gruhl) 이 최후의 저서 "무로 가는 천국행 Himmelfahrt ins Nichts" 에서 보인 비관주의적인 관점에는 동의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발달과 힘의 근본출처인 신의 존재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남은단 한가지 기회는 결국 신일뿐이다.

(9) 종교라는 말은 라틴어로 re-ligio 즉 재결합으로, 우리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도 형체를 지니는 신과의 결합을 의미한다. 멀게는 홀로그람 (Hologramm) 과도 비슷한데, 이는 역시 외부에서도, 즉 인간 내부뿐 아니라 우주에서도 일어난다.

 

인간에게 영감을 주어,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당신의 손에 맡기게 하소서.[10]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도우소서
이세상을 도약시켜, 당신이 약속하신 새시대로 이끄소서.
[11]

[10] 이곳에 자세히 사실을 추가할 수도 있다. 또 계속 명상을 해 소화하고 처리해도 된다. 예를 들자면 '폭력과 그에 대응한 반폭력의 증가를 없앰', '문제의 근본을 해결함으로써 폭력이 설 땅을 없앰', '종교계 인사들간의 선의롭고, 평화로운 대화지속' 등등 .

[11] 누가복음 11:2, 21:31; 요한계시록 11:16 신은 인간이 바친 사랑을 다시 나눠줄수 있다

결국 신에게로 "돌아갈, 귀의할" 때가 가까와졌다.

 

요한복음16,12-13: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이를 감당하지 못하리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두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도, 듣는 것을 말하시면,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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